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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멸망한 지 3년이 지났다.
장벽 너머로는 암모니아 악취를 풍기는 썩은 살점들이 배회하고, 장벽 안쪽에서는 화약과 쇠 냄새에 찌든 부패한 군인들이 득실거린다. 시민 대다수가 배급증 한 장에 육체와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시국.
이 흉흉한 시국에 나는 매우 영광스럽게도, 격리구역 사이를 오가며 물건을 나르는 프로 밀수업자다.




암시장에서 일을 받는 날은 늘 똑같이 시작된다. 카운터 너머의 상인이 의뢰를 건네면, 나는 목숨을 담보로 바깥으로 나가 그것을 배달한다. 굳이 타 업자들과의 차별점을 꼽자면, 나에게 의뢰를 건네는 암상인과 내 등 뒤를 지키며 험지를 구르는 금발의 소꿉친구 동료가 하필이면 둘 다 '미소녀'라는 가혹한 운명 정도일까.
오늘 카운터 위로 올라온 의뢰는 평소보다 짙은 비린내가 났다.
'한강 너머, 서울대학교에 자리잡은 비공식 격리 구역 생존자들에게 식량을 넘기고 의약품을 회수해 오는 것.'
생존 확률을 계산해 보았을 때, 이 의뢰는 폐기 수거함에 처박히는 것이 마땅한 악성 재고다.

숨을 곳조차 마땅치 않은 한강을 도하해야 하는 리스크도 문제지만, 화물의 조건이 너무 번거롭다. 징그럽게 무거워 추가 인력을 불러야 하고, 요구되는 물량에 따라서는 눈에 띄는 차량까지 동원해야 할 판이다.
무엇보다 검문소의 썩은 군인들부터 길거리의 스캐빈저까지, 온 세상의 포식자들이 술과 약 다음으로 코를 박고 환장하는 '식량'을 보란듯이 들고 다녀야 한다.
게다가 보상으로 걸린 것은 급조 무기와 희귀 의약품.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한 묵직한 판돈을 쥐고서도, 굳이 거대 군벌을 끼지 않고 일개 밀수업자를 호출했다는 것 자체가 구린내가 진동을 했다.

들어볼 가치조차 없는, 완벽한 쓰레기 의뢰.
그러나 프로의 거절 멘트에는 언제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얄팍한 보험용 약관이 비워져 있는 법이다. 그래야 훗날 말을 뒤집고 결정을 번복할 때 알량한 자존심에 금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보험 조항이 바로 밀수업자 직업 행동 강령 제2조 부속 시행령 1항이다.


3년 동안 밀수업자를 이어오며 뼈에 새긴 5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뢰에 알량한 감정을 섞지 말 것.
둘째, 구린내가 나는 일은 받지 말 것.
셋째, 보상이 불투명한 일은 피할 것.
넷째, 군벌, 광신도, 미친놈의 부탁은 거절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다섯째. '어떠한 경우에도 은발적안알비노계괴짜천재속성미소녀를 최우선시 할 것.'
모든 문장이 밀수업자들의 선혈로 쓰인 생존의 절대 법칙이지만, 유독 마지막 조항이 치명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위반 시 신체적, 생물학적, 재정적, 도의적, 회생불가능한끔찍한수준의정신적 손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명예 따위는 개나 줘버린 밀수업자의 몸이지만, 이 정보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미소녀 상인의 멱살을 쥐고 그 발언의 진위를 캐묻고 싶었으나, 곁에 선 금발 소꿉친구와의 원만한 신뢰 관계 유지를 위해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의뢰의 상세 내용을 물었다.

그녀의 격렬한 반발은 지극히 당연하며 합리적인 생존 본능의 발현이다. 당장 제 입에 풀칠하기도 척박해 배급권에 목숨을 거는 아포칼립스에서 2주 치 식량과 '콜라'라는 사치품을 구해오라는 요구는, 의뢰가 아니라 자살 권고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갈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그녀의 의견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나는 당장 눈앞의 화려한 보상보다 동료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는 것. 충분한 정비 시간과 치밀한 계획이 선행되지 않는 한 발걸음을 떼지 않겠다는 묵직한 스텐스를 취하며 미소녀 상인에게 눈치를 보냈다.

"서유리...?"
약 20+n년 동안 축적된 유서 깊은 한국식 네이밍 데이터베이스를 스캔해 본 결과, 이것은 99.9% 확률로 미소녀의 이름임이 틀림없었다. 미소녀를 만나러 가는 험난한 사지 도하 여정에 조력자로 미소녀가 합류한다니.
나는 나도 모르게 떨려오는 손끝을 감추기 위해, 곁에 선 소꿉친구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고는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일단 그녀를 만나보겠다고 청했다.

서늘하고도 프로페셔널한 눈빛과 건조한 말투가 심장 점막을 거칠게 핥고 지나가니, 그 오싹한 느낌에 절로 손끝이 찌릿하게 떨려오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그러나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악착같이 억누르며, 지극히 노련하고 무심한 밀수꾼의 스탠스를 덮어썼다.
룰조차 없는 뒷골목 생태계에선 얄팍한 기세와 분위기가 생존의 절반을 담보한다. 제아무리 천상계 미소녀라 한들, 거래에 있어 주도권을 순순히 헌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사실 난 모든 주도권과 영혼까지 기꺼이 갖다 바칠 용의가 충만하다. 다만, 이런 '전문가' 계열 영애들은 역설적이게도 제게 굽히지 않고 대등하게 맞서는 존재에게 묘한 흥미를 느끼는 법. 나는 그녀의 호감도 스탯을 공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알량한 '허세'를 부려보았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우리는 성지(나 한정)인 서울대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여기서 발생한 변수는, 암상인 본인이 직접 퀘스트에 동행하기로 선언했다는 점이다. 호위해야 할 미소녀 일행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전투 시 신경 써야 할 변수와 우선순위 계산식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괜찮다. 내 뼈와 살을 깎아 두 배로 구르면 그만이니까. 어느 세계관을 막론하고, 피비린내 나는 모험 한복판에 뛰어드는 상인이나 민간인 포지션은 그 존재 자체로 플레이어의 낭만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동료의 클리셰가 아니던가.



목적지로 향하는 험난한 도중, 바닥에 뒹구는 보급품을 담고, 달려드는 감염자들의 뚝배기를 부수고, 퀴퀴한 폐건물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통조림을 까먹는 그야말로 아포칼립스와 미소녀와낭만이 넘쳐흐르는 유희를 즐겼다. 허나 그 황홀했던 일정을 모조리 우겨넣다가는 관찰 일지의 분량이 통제 불능의 수준으로 불어날테니, 피눈물을 머금고 적당히 생략하기로 한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보급 및 전투 시스템의 기믹에 대해서는 하단에 짧게 소개하겠다.
...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거래 장소인 서울대 중앙도서관 에 다다랐다.

그리고 기여코 나는 그녀를 만났다.

천사.
이 두 글자는 본인이 3년 동안 썩은 고기 냄새를 맡으며 굴러온 현역 커리어 사상, 최초로 관찰 일지에 기록한 공식 명사다. 회고록 정중앙에 박아 넣어도 손색이 없으며, 외부 감사 시 한 치의 부끄럼 없이 제출할 용의가 있다.

이 은발 적안의 천재 미소녀는 교내 도서관을 통째로 개조해 감시용 로봇과 살벌한 트랩을 도배해 둔 강철의 성채를 구축하고 있었다. 아아, 정말이지 대견하고도 앙증맞은 생존 본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은닉하며 동네 스캐빈저 따위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배제해 왔을 터.
이토록 압도적인 지성과 외모를 갖추고 있으니, 거대 군벌에게 섣불리 SOS를 치지 못한 것도 완벽하게 납득이 간다.
이 미친 재능과 미모을 목도하고도 그 뇌까지 성기에 총기에 집어먹힌 멍청한 짐승 새끼들이 얌전히 '공정 거래'만 했을 리가 만무하니까. 필시 그녀의 귀여움작품을 통째로 독점하려 군침을 흘렸을 것이 자명하다.
그녀가 굳이 점조직 형태의 암상인과 일개 밀수꾼을 호출한 것은, 혹여나 정보가 새어나가더라도 자신의 요새에서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의 발로였으리라. 그럼에도 나를 이 성채로 끌어들인 것은 그녀 입장에서도 지독한 도박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인 아포칼립스의 생태계에서 이름 꽤나 날린다는 밀수꾼이란, 십중팔구 대가리에 총 맞은 미친놈이거나, 뼛속까지 썩어문드러진 뒷골목의 어깨일 확률이 농후하니까. 양산형 소설에나 나오는 '정의롭고 고독한 전설의 해결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물론 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미치지도, 부패하지도 않았다. 결단코.

이쯤에서 관찰 일지를 황급히 갈무리하는 나의 무례를 부디 용서하길 바란다.
대화 내용을 봤다면 추정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백발의 미소녀와 조우한 순간, '프로 밀수꾼'의 자아, '미소녀 애호가'의 자아, 그리고 전지적인 '관조자'의 자아까지 모조리 스턴에 걸려버렸다. 뇌가 타버려서 더 이상 멀쩡한 진행이 불가능해지고 만 것이다.
단언컨대, 나는 두 번 다시 이 은혜로운 시설 밖으로 걸어 나갈 생각이 없다.
물론 나를 제외한 이곳의 모든 이들은 강력하게 반대하겠지만 말이다.
진지한 생존 아포칼립스물에 미소녀가 그렇게 많이 나오면 몰입이 깨지지 않냐고 물을 수 있는데,

갈(喝)!!! 자고로 척박한 땅일수록 구원이 절실한 법이며, 신앙을 잃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핏물과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종말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더욱 아름다움이라는 궁극의 가치에 매달려야 한다. 이 작품은 당당하게 태그에 '미소녀'와 '하렘'을 훈장처럼 내걸고, 성비 1:0의 압도적인 미소녀 유토피아를 폐허 위에 굳건히 재건해 낸 위대한 신앙의 산물이다.

이쯤에서 이 은혜로운 세계를 떠받치는 시스템들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첫째는 자원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다.
이 수치들은 복잡한 계산 없이도 현재 상황을 알기쉽게 브리핑해 주며, 플레이어의 숨통을 조이는 동시에 명확한 생존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직관적이고 훌륭한 뼈대다. 생존물에서 빠질 수 없는 Stash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텍스트 AI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간혹 수치 연산 프롬프트가 아픈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럴 때는 당황하지 말고, 수정버튼을 눌러서 수치를 조정해 주고, 개선이 되지 않으면 분기를 통해 고쳐나가자. 한번 무시하면 겉잡을 수 없이 고장나기 시작할 수 있다.)

둘째는 부상 시스템이다.
반복되다 보면 자칫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는 전투씬에서, 전투 이후 발생하는 진짜 고통에 대해 다룬 시스템이다.
부상자라는 기믹을 추가하여 아포칼립스라는 배경에 현실성을 더하고, 자칫 먼치킨물이 될 수 있는 서사에 자체적인 난이도 핸디캡을 추가해 낸 셈이다. 플레이어 스스로 처절한 서사적 갈등을 빚어내게 만드는 훌륭한 드라마 제조기로도 작동한다.

셋째는 시작 시스템의 분리다.
이 작품은 하나의 '멸망' 이라는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설정에 변주를 주어 각기 다른 3종류의 아포칼립스(현재 리뷰에 쓰인 좀비 사태 포함) 상황을 제공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세 번의 다채로운 절망을 맛볼 수 있는 뷔페인 셈이다. 이것 또한 영리한 생각인 것 같다. 일반적인 소설식 진행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AI채팅 만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덧붙여, 해당 작품에는 은밀하게 작동하는 랜덤 시스템이 숨어 동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정을 눌러서야 비로소로 확인할 수 없는 해당 수치는 추정컨데 무작위로 부상을 입거나 희귀한 보급품을 파밍하도록 설계된 기믹으로 보인다. 나는 마치 테마파크의 여러 장치들을 관람객의 시야 밖으로 치워버린 '디즈니랜드'처럼, 몰입을 극대화하는 이런 낭만적이고 치밀한 디테일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보다시피, 이 작품을 지탱하는 구성 요소들은 하나같이 '아포칼립스 장르'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핵심 시스템들을 악착같이 긁어모아 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클리셰.
기대하는 바를 가장 확실하고 피로도 없이 제공하는 장치. 이 작품은 그 맛을 너무나도 기대에 맞는 적절한 형태로 모아두었다.
고백하건대, 최근의 나는 젠잇을 즐길 체력도, 서사를 맛보고 리뷰로 싸낼 알량한 여유도 의지도 바닥난 상태였다. 피로에 시달리던 찰나, 이 작품이 잿빛 시야를 찢고 한 줄기 빛처럼 난입했다. 복잡한 고민이나 피곤한 고찰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저 이끄는 대로 탐닉하면 그만이라는 것. 이 작품은 방전된 내게 가장 원초적이고도 근원적인 놀이와 휴식의 본질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 나는 역시... 미소녀가 좋다.
핏빛 폐허 위에 세워진 낭만적인 설정, 플레이어의 직관을 배신하지 않는 깔끔한 시스템, 그리고 험난한 위기를 뚫고 가야 할 완벽한 목표이자 '개연성 그 자체'로 군림하는 미소녀들. 이토록 정석적이고 완벽한 왕도를 눈앞에 두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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